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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인생박물관] 남성희 대한노인회 계룡시지회 부지회장 남들이야 어쩌든 내 소신대로 살아가는 행복삶
남성희(南聖熙, 74세) 대한노인회 계룡시지회 부지회장은 평생 공무원으로 살아왔다. 그는, 그간의 삶으로 터득한 자신만의 믿는 바 “신념대로 사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자 행복한 생활의 기초”가 된다고 강조한다. 운전 안하고 걷기, 수영 안하기, 병원 안가기 등 그가 소신을 갖고 실천하는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소로 삼남매 키워낸 ‘어머니의 일생’
어머니 이야기 보따리부터 풀어졌다. 어머니 청주 한(韓)씨는 일제 강점기 때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18살 나이에 한 살 아래 아버지와 결혼했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남성희 부지회장은 차남이다. 결혼생활도 잠시, 해방에 이어 6·25동란이 일어나면서 지주였던 그의 아버지는 한밤중 집안 머슴에게 끌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전쟁이 일어나자 ‘세상이 바뀌었다’고 완장 찬 사람들이 지주들을 잡아다가 죽이던 그런 시절 이야기다. 졸지에 홀몸이 된 어머니는 어린 2남 1녀를 아버지 없이 키워야만 했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 24살이었다. 집 안팎의 일을 도맡아 해야만 했지만, 흔들림 없이 3남매를 억척같이 키웠다. 그 당시 집에 소가 두어 마리 있었다. 마을에 소 있는 집이 몇 집 되지 않을 때였다. 현대화된 농기구가 보급되기 전에는 소가 유일한 농사짓는 도구였다. 그래서 소가 없는 집에서는 소를 빌려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그의 어머니는 소를 빌려주는 대신 집안 농사일을 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그의 어머니는 집 안팎의 일을 동시에 보면서 3남매를 키운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키도 크고 미인이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또한 몸가짐이 바르고 강단이 있는 성격이어서 모든 마을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어머니 앞에서 예의를 갖췄다. 또한 어머니는 장자선호사상이 강해서 큰아들인 형만 위해 바쳤다. 그래서 두 살 위인 형은 서울로 유학을 보내 고등학교를 다니게 했고, 둘째인 그는 시골 고향집에서 농고를 다녀야만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세종시에서 공무원생활을 하던 때에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지만 정작 어머니 말년에는 곁을 지키지 못했다. 임종 당시 어머니가 외롭게 지내셨는데, 이를 생각하면 자신이 “큰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군위생병 시절 생긴 불신과, 공직의 길
그는 고향인 당진 합덕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그의 집은 워낙 크고 방도 많아서 타지에서 전근오신 학교 선생님들이 그의 집에서 지냈다. 그의 어머니가 무료로 선생님들에게 방을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선생님들로부터 특급 과외를 받을 수 있었고, 그 결과 그의 영어 실력과 수학 실력은 합덕에서는 최고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였다. 위생병으로 근무한 그는 군의관들의 많은 비리를 보고 겪으며 의사들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또 그들로부터 인간적인 서러움을 받으면서 그런 마음이 더욱 커졌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온 군의관들은 5년 간 장교로 의무복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리와 부패 저지르며 사익 챙기는 걸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그는 지금껏 병원을 웬만해선 안 간다고 한다. 그의 좌우명은 “아프지 말자”이다. 그가 군에 있었던 그 시기(1968년)에 김신조 등 북한 공비들이 침투한 1·21사태가 벌어져 군 복무 기간이 28개월에서 36개월로 늘어났다. 그 결과 전역을 못한 고참 병장들이 내무반에 즐비하여 병영생활이 무척 힘들었다. 그는 월남에 참전한 파월장병들만 국가적 혜택을 줄 것이 아니라, 그 시기 힘든 군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도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71년 군을 제대한 그는 고려대학교를 목표로 재수를 했으나 실패하고, 1973년도에 공무원시험을 보았다. 영어와 수학만큼은 자신이 있었던지라 그는 충청남도 행정직 공무원으로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는 2003년 충남 연기군에서 퇴직할 때까지 33년 간 공무원으로 봉직하며 병사, 세무, 건축 등 일반행정 업무를 보았다.
아내 말 들어가며 ‘꾸준한 걷기’로 건강관리
그는 나이 30세인 1977년도에 중매로 결혼하였다. 경희대학교 법대를 나온 야성이 강한 인텔리 외삼촌이 중매를 서주었기에 믿고 바로 결혼을 추진하였다. 그 해 1월에 선을 보고 3월에 결혼을 올렸으니 초스피드라 할 수 있겠다. 상대는 양반 집안의 외동딸이었는데 그보다 4살 이래인 이선(李仙, 70세)이었다. 그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니까 혼처가 쉽게 나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을 뿐더러 오히려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잘 모셔주어서 고마울 따름이란다. 결혼 후 자녀는 1남 3녀를 두었다. 그의 자식들은 공무원의 박봉으로 뒷바라지를 충분히 해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열심히 공부해주었다. 큰딸은 애니메이션 작가로, 둘째딸과 셋째딸은 공무원으로 나갔다. 아들도 서천에서 공무원으로, 며느리는 서울서 경찰공무원으로 모두 자리를 잡고 각자 처한 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그가 은퇴하고 나서는 둘째딸 가족을 따라 영국에서 잠시 생활하며 머물기도 했다. 육순 때는 호주와 뉴질랜드로, 그리고 칠순 때는 필리핀 세부로 효도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머리에 쓴 모자서부터 발끝 신발까지 모두 자식들이 선물한 것이라며 “자식들한테 효도 받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어디 있겠냐”며 자랑 한가득이다. 이제 그는 아내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는 신앙심이 우러나와서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아내 말 들어서 손해 볼 일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 아버지’라는 소리가 잘 안 나오는데, 아마 이것은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란다. 또한 그는 다양한 여가활동으로 그의 노후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한글서예활동도 꾸준히 해온 그는 2016년부터 두마게이트볼 회장을 맡아오고 있으며, 파크골프로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요즘도 하루에 2만보씩 꼭 걷는다. 평생 운전을 하지 않는 그는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닌다. 그가 하지 않는 것은 운전뿐 아니다. 수영도 그러한데, 어려서 마을에 있던 연호제라는 저수지에 빠져서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물가에는 절대 가지 말라”는 어머님의 주의대로 그 이후로는 수영도 하지 않았다. 평상시 살아온 것들이 신념이 되고, 그 신념대로 살면 행복하다는 그의 지론은 건강의 비결인 성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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