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특집] "광복의 그늘에서 피어난 위대한 이름, 유응두"조용히 시대를 견디며, 나라를 일군 '대한민국의 어머니'
1949년 11월 17일, 광복단 신도지부는 충렬사(계룡시 신도안면에 소재하였으나 3군본부 이전으로 철거됨)에서 '순국선열추도제'를 거행하였다. 일제에 항거하다 이름 없이 산화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넋을 기리는 이 자리에서 한 여인이 쓴 한 편의 추도문이 낭독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유응두. 그녀가 직접 써내려간 추도문은 당시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게 적셨다. 추도문의 원본은 한훈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 '대한민국의 어머니' 유응두, 그녀는 누구인가
유응두(1890~1976) 여사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후에 국내 항일무장투쟁의 거장 한훈 의사의 부인이 되었다.
한훈 의사는 친일관리 직산군수를 주살하고 대한광복단을 결성하여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을 지원하였고, 사이토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암살 시도 등 온몸을 던져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는 일제에 의해 19년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정작 역사의 빛에서 벗어나 있었던 인물은 그 곁을 지키며 모든 고통을 함께 짊어진 유응두 여사였다. 영화 '밀정' 등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국내 한복판에서 암약했던 일정부 요인 암살단원인 한훈 의사를 체포하기 위해서 최고의 악질 가혹행위를 가한 대상은 바로 한훈 의사의 부인 유응두 여사였다.
그런 연유로 유응두 여사의 친정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래서 유 여사는 한훈 의사의 행방을 쫓는 일경을 피하고, 본가 식구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첫째 세택을 본가 뒷산에서 몰래 출산했다.
1917년, 그녀는 한훈 의사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전주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1920년에는 가택 수색에서 총기가 발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 모진 고문으로 어깨 팔 등이 부러지는 고초를 겪었다.
이후 한훈 의사가 투옥되면서 대전형무소, 전주형무소, 신의주형무소, 서대문형무소 등 전국을 누비며 20여 년간 옥바라지를 했다. 1939년 한훈 의사가 출소한 이후에는 논산군 두마면 정장리에 거주하면서 한훈 의사 신병 치료에 매진했다.
■ 독립운동 뒷감당한 여인의 한(恨)서린 교육
해방이 되고, 광복이 찾아 왔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다.
유응두 여사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식과 후손들에게 올곧은 삶을 주문하며 강한 교육철학을 전수했다.
유응두 여사는 한훈 의사와의 사이에서 두 남매를 두었다. 딸 정수는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1923년 독립운동가들의 무덤인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수백 명의 일경과 교전 중 순국하신 김상옥 의사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들 세택은 강경에서 사업을 하던 중 부친이 북송 도중 사망하게 되자 신도안으로 들어와 어머니를 모시면서 살았다.
아들 세택은 상희, 상빈 두 형제를 남기고 상처를 해 다시 결혼했다. 그런 연유로 현 신도안향우회장인 한상빈씨는 할머니인 유응두 여사와 7세부터 함께 살았다.
한상빈씨의 증언에 따르면 유응두 여사는 부드럽게 때로는 단호하게 응했으며 교육만큼은 유독 엄격하셨다고 한다. 한상빈씨는 신도안에서 중학교까지만 나왔다. 서울의 고등학교에 합격하고도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실망한 소년은 할머니에게 푸념하듯 말했다.
"그까짓 독립운동 해봤자 뭐해요?"
그러자 유응두 여사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놈아, 할아버지가 그 일 하신 게 우리 집안 자식들 잘되라고 그런 줄 알아? 나라를 위한 일은 그렇게 속 좁은 게 아냐!"
이 짧은 말은 단지 꾸지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립운동의 진정한 의미를 후손에게 전하는 대한민국 어머니의 정신교육이자 유언이었다.
유응두 여사는 손자에게 "자유와 평등, 정의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심어주었고, 그런 교육을 통해 민족의 뿌리를 이어가고자 했다.
■ 그림자처럼 함께한 한훈 의사의 투쟁사
한훈 의사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항일무장투쟁의 1인자이다. 그는 해외에서 투쟁한 것이 아니라 국내 무장 항일투쟁을 이끈 중심인물로, 해외 망명 대신 조선 본토에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섰다.
특히 1920년, 그는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해 일본 총독을 처단하고자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체포된다. 이후 그는 19년 6개월간 전국 각지의 형무소를 전전하며 옥고를 치렀다.
이외에도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해외 투쟁도 동참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서훈됐다. 2002년에는 국가보훈처에서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을사오적척결결사대, 광복단, 광복회조선독립군사령부, 광복단결사대에서의 무장투쟁 등 그 모든 투쟁의 이면에는 말없이 그의 곁을 지킨 아내 유응두 여사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결사대도, 광복단도, 그리고 후대에 전해진 정신도 제대로 뿌리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 2025년, 광복 80주년 우리에게 주는 질문
광복 80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그녀의 삶을 '조용한 희생'이 아닌, '역사의 동반자'로 바로 세워야 할 때이다.
계룡시 정장리에 위치한 한훈기념관은 두 인물의 고난과 정신을 기록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어머니 유응두 여사의 이야기는 여전히 낯설다.
이 땅의 광복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이들의 눈물, 고통, 투쟁, 헌신이 모여서 가능했던 것이다.
광복 80주년인 오늘, 우리는 유응두 여사의 삶을 기억하는 것으로 새로운 시대의 출발선에 선다. 그녀가 바란 조선의 독립과 가족의 안녕, 우리는 과연 얼마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가?
- 전영주 편집장 <저작권자 ⓒ 논산계룡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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